오늘의 SK를 만든 결정적 순간들
패기의 청년, 피폭된 공장을 인수하다
1944년 경기도 수원, 한 열아홉 청년이 옷감 공장에 취직했다. 성실하고 추진력 있던 그는 금세 생산부장직에 올랐지만, 이내 “내 사업이 하고 싶다”며 공장을 그만 두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은 전공을 살린 원사 도매업이었다. 초반에 잘 되던 사업은 전쟁 후 급속히 어려워졌다. 그때 청년은 청춘을 바쳐 일했던 옷감 공장이 떠올랐다. 하지만 공장은 전쟁 중 폭격으로 대부분의 직기가 녹아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청년은 모두가 외면한 이 공장을 인수하기로 마음 먹는다. 53년 4월 8일 청년은 나라에 이 공장을 인수하겠다는 제안서와 인수 자금 일부를 냈다. 그 때부터 직원들과 손수 직기들을 재조립해 공장을 재건했다. 이 공장이 SK의 모태가 된 선경직물, 이 청년이 SK를 만든 최종건이다. 4월 8일은 SK의 창립기념일이 됐다.
똑똑한 동생, 자신의 유학자금을 형에게 양보하다
젊은 최 회장은 무슨 돈으로 공장을 인수했을까?
최 회장 부친의 생각은 이랬다. 장남인 최종건은 사업으로 밀어주고, 똑똑한 둘째 최종현은 유학을 보내는 것. 최종현은 부친이 형의 사업자금과 자신의 유학자금을 모두 지원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결정을 내렸다.
“먼저 형의 사업비를 대주시고, 유학은 나중에 가겠습니다”
동생이 양보한 유학 자금으로 선경은 첫삽을 떴다.
그렇게 인수한 선경직물은 1950년대 직물업계의 히트작인 ‘닭표 안감’, ‘봉황새 이불’을 내놨다. 이 기세를 몰아 수출에도 힘썼다. 54년 유학을 떠났던 최종현은 62년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돌아와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다 73년 최종건 회장이 48세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자,
최종현이 선경의 경영을 담당하게 됐다.
석유부터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천명
최종현 회장은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지만 학부 때는 서울대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이후 미국 위스콘 신주립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한 사물을 이루는 화학구조를 알던 최 회장은 1975년 신년사에서 중요한 결정을 발표한다.
석유부터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하겠다
옷감, 원사, 정유 과정까지 모두 선경이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원사 제조를 일본 기업들이 쥐고 있다보니 가격이 늘 불안정했다. 또 원사를 만들려면 정유 사업도 불가피했다.
하지만 업계 반응은 차가웠다. 게다가 1970년대 제 1,2차 오일쇼크까지 터졌다. 그래도 최종현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유공 인수, 새우가 고래를 삼키다
1973년, 이스라엘과 아랍 석유산유국의 외교 전쟁은 제1차 오일쇼크로 이어졌다. 한국 정부는 정재계 인사를 사우디로 급파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때 한 정부 관계자가 “최종현 회장이 미국 유학시절부터 중동의 석유상과 두터운 신뢰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1,2차 오일쇼크 때 비공식 정부사절로
사우디에 찾아가 원유 공급의 물꼬를 텄다.
1980년, 유공의 민영화를 앞두고 현대, 삼성, 남방개발 등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정부는 유공의 지분을 선경에 넘기기로 했다.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선경의 자금력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선경이 오일쇼크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덕분이라는 평이 잇달았다. 유공 인수 후 선경은 재계 순위 5위까지 뛰어올랐다.
제2이동통신사업 사업권을 반납하다
최 회장이 유공 인수 후 점찍은 다음 사업은 이동통신이었다. 84년 정보통신 선진국 미국에서 이동통신 사업 위한 팀을 신설해 핵심 기술을 확보했다. 90년, 노태우 정부가 제2이동통신 사업자 를 선정하겠다고 발표하자, 선경·포항제철·코오롱 등이 사업계 획서를 냈다. 외국 파트너사에 계획서 작성을 맡긴 다른 기업과 달리, 선경은 총 20만쪽의 사업계획서를 직접 써내 1위를 차지했 다. 사업자 선정 실무 책임자 였던 석호익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재무·투자·안정성 등을 고루 따졌는데, 선경은 모든 항목에 잘 들어 맞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경이 사업자로 선정되자, 곧 청와대 사돈 특혜 논란에 휩싸였다. 선경은 이런 결정을 내렸다.
국민통합을 위해 사업권을 반납한다.
정경유착 의혹을 불식시킨 후 실력으로 재평가 받겠단 뜻이었다.
한국이동통신 4000억원 인수
93년 출범한 문민정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전경련이 결정하게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최종현 회장은 92년 다시 한번 결단을 내렸다. 재계의 화합을 위해 제2이동통신사업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곧 민영화될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인수전이 시작되자 8만원대였던 주가가 33만원까지 치솟았다. 총 인수 금액은 4271억원. 고가 인수 논란이 일자, 최 회장은 이렇게 일축했다.
지금이야 비싸게 주고 사는 것 같지만,
나중 일을 생각하면 싸게 산 것이다.
그 뒤 SK텔레콤은 95년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에 성공했고, 98년 가입자 수 500만명을 기록했다. 2000년대엔 TTL로 젊은 세대까지 사로잡으며 시장을 석권했다. SK는 이동통신 인수로 두번째 도약에 성공했다.
하이닉스 인수
2018년 SK하이닉스 영업 이익은 20조원. 2011년 SK가 인수한 후 가장 큰 실적이었다. 83년 설립된 하이닉스는 IMF 외환위기 때 채권단의 공동관리를 받았고, 2000년대에는 운영 불안정 등의 이유로 주가가 135원까지 떨어졌을 만큼 힘겨운 길을 걸었다. 2011년 매각 당시 SK와 STX만이 인수전에 참여했고, 결국 SK가 3조 4000억에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우려와 내부 반대가 높았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반도체를 공부해온 최태원 회장은 이 결정에 대해 주변을 설득했다. 이후 꾸준한 투자가 반도체 사이클과 맞물려 2018년 놀라운 실적을 냈다. 올 11월엔 인텔 낸드 부문을 10조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30여년의 투자, 신약 개발
지난 7월 SK바이오팜 상장시, 공모주 청약에 31조원이 몰렸다. 공모가는 4만9000원, 상장 사흘 만에 주가는 4배가 올랐다. 또 다른 성과도 있었다. 최근 빌게이츠 재단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국의 코로나 대응에 감명받았다”며 보낸 편지에 SK 바이오사이언스가 언급된 것. 뜨거운 감자가 된 SK의 바이오,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최종현 회장은 33년전, 87년 선경합섬 안에 생명과학연구실을 만들면서 투자를 시작했다.
30년 후엔 그룹을 먹여살릴 분야라고 했던 그의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실제 수천억원이 필요한 신약·백신 개발은 연구진 실력 뿐 아니라, 투자를 지속하는 회사의 의지도 중요하다.
최태원 회장은 부친의 뜻에 따라 “꾸준히 하는 것보다 더 믿을 것은 없다"며 뚝심 투자를 계속했고, 그 빛은 2020년에 발하고 있다.
SK가 중요한 기로에서 내린 결정의 기준은 한결 같았다.
당장의 이익 보다는, 20~30년 후의 가치였다.
미래를 보는 지성과 이를 실현하는 패기는 여전히 SK를 이끄는 동력이 되고 있다.
- 사회적 가치
- 행복
- 친환경
SK가 내린 새롭고 과감한 이 결정은 오늘도 새 길을 열고 있다.
기획/취재 김나현 기자 브랜드매니저 한예린 차장 디자인 안은정 웹개발 윤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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