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도쿄에
상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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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일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나 브랜드는 ‘K’를 떼야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K’를 붙여야 관심을 받는 ‘K-프리미엄’이 생겨났다. 과장이 아니다. 2024년 현재, 도쿄의 트렌드 발신지로 꼽히는 시부야에서는 연일 한국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가 열리고, 명품 거리로 불리는 아오야마에 문 연 한국 브랜드의 매장 앞에는 매번 긴 줄이 늘어선다. 이세탄·마루이 등 일본 주요 유통 업체에서는 도쿄에 상륙하지 않은 한국의 ‘핫’ 브랜드를 찾는데 여념이 없다. 분명 우리보다 패션에서, 소비재에서 ‘한 수 위’였던 일본의 변화다. 자국 브랜드 사랑이 유난히 뜨거워 ‘내수 철옹성’으로까지 불렸던 일본이 한국 브랜드에 무장 해제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STORY 1

도쿄의 뜨거운 ‘K-오픈런’

지난 5월 28일 찾은 일본 도쿄 파르코 시부야점 3층. 에스컬레이터를 오르자마자 유난히 북적이는 매장이 나타났다. 57㎡(17.4평) 규모의 국내 패션 브랜드 ‘마뗑킴’의 팝업 스토어다. 현대백화점과 파르코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팝업 스토어에서는 약 두 달간 12개의 한국 브랜드가 소개된다. 지난달 10일 ‘노이스’를 시작으로, ‘마리떼프랑소와저버’ ‘마뗑킴’ 등을 순차적으로 선보였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마뗑킴이 문을 연 지난 5월 24일에는 3000명이 넘는 고객들이 한꺼번에 몰려 매장 앞에서부터 1층 백화점 입구를 지나 지하층의 직원 통로까지 대기가 이어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마뗑킴 관계자는 “파르코 측도 이런 인기는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라면서 “일본에서 열린 한국 패션 팝업스토어 중 최대 인원”이라고 귀띔했다.

지난달 10일부터 일본 도쿄의 파르코 시부야점에서 열린 더현대 글로벌 팝업스토어. 릴레이 팝업 중 세 번째 브랜드인 마뗑킴 팝업에 입장하기 위해 고객들이 줄을 서고 있다. 사진 마뗑킴 사진 마뗑킴

일본 Z세대, “한국 패션 귀여워”

팝업스토어를 찾는 고객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현지 여성들이다. 이날 만난 이들 중엔 마뗑킴의 티셔츠를 입거나 품절된 가방을 가지고 온 브랜드의 ‘찐팬(진짜 팬)’도 종종 보였다. 아이리(20) 씨는 “패션 학교를 졸업한 친구의 ‘틱톡’에서 마뗑킴을 처음 알게 됐다”며 “최근 한국 브랜드가 무척 귀여워 보인다”고 말했다.

파르코 시부야점에서 열린 마뗑킴 팝업 스토어는 지난달 24일부터 주말 3일 간 2억4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사진 마뗑킴 사진 마뗑킴

높은 관심만큼 실제 매출도 높다. 마뗑킴의 경우 금·토·일 주말 3일 매출만 2억4000만원에 달했다. 팝업 스토어가 있는 파르코 3층에서 최고 매출을 찍는 매장의 월매출이 3억원 수준이다. 히라마츠 유고 파르코 시부야 점장은 “매출이나 고객 반응 모두 예상치의 1.5배 정도 높다”며 “보통 매장이 한 달 동안 만드는 매출을 2~3일 안에 내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오는 7월 28일까지 약 두 달간 팝업에서만 약 4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미상륙’ 한국 브랜드 찾아라,
K-팝업 열풍

한국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는 이미 일본 리테일 업계의 히트 상품이다.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이세탄 신주쿠점 2층은 일본 유행 패션의 바로미터로 불린다. 이곳에서도 지난해부터 ‘더 바넷’ ‘포츠포츠’ ‘낫띵리튼’ 등 한국 패션 브랜드의 팝업이 연이어 열리고 있다. 이세탄 프로젝트팀에서 한국 브랜드 행사를 가장 많이 기획하고 있는 미야지 사호씨는 “이세탄 고객들 사이 ‘한국 브랜드’라는 하나의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제안한 한국 브랜드 팝업 대부분 목표 매출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에 방문해 새로운 브랜드를 발굴한다. 오프라인 매장이 없는 경우 브랜드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제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연락을 취하는 등 적극적으로 브랜드 탐색에 나선다.

일본 유행 패션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이세탄 신주쿠 3층에서 열린 한국 브랜드 쿠메의 팝업 스토어 전경. 사진 쿠메 사진 쿠메

팝업 스토어는 본격적인 일본 시장 진출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지난 1월과 3월 두 차례 이세탄 신주쿠점에서 팝업 행사를 진행했던 패션 브랜드 ‘쿠메’의 김보영 대표는 올가을 일본을 겨냥한 온라인 몰을 오픈하기로 결정했다. 김 대표는 “1월은 비수기로 통하는데도 목표 매출을 이뤄 3월에 다시 팝업을 열었다”며 “일본 시장에 조금씩 문을 두드리고 있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일본 내 한국 패션 브랜드 진출 및 팝업 현황

TOKYO
NAGOYA
OSAKA
1
2
3
4
5
6
7
8
9
10
11
ISETAN

이세탄 신주쿠 팝업스토어
(더바넷 · 포츠포츠 · 낫띵리튼 · 쿠메 등)

thisisneverthat

디스이즈네버댓 도쿄 플래그십 스토어

KIRSH

키르시 도쿄 플래그십 스토어

MUSINSA

무신사 도쿄 팝업 스토어
(아모멘트 · 떠그클럽 등)

BUYMA

시부야 바이마 스튜디오 팝업 스토어
(레스트앤레크레이션 · 페넥 · 마뗑킴 등)

XEXYMIX

젝시믹스 시부야 플래그십 스토어

THE HYUNDAI

시부야 파르코 더현대 글로벌 팝업 스토어
(마뗑킴 · 노이스 · 이미스 · 미스치프 · 마리떼프랑스와저버 등)

LOFT

로프트 펀펀서울 & K코스메 페스티벌 기획전

GENTLE MONSTER

젠틀몬스터 아오야마 플래그십 스토어

Mardi Mercredi

마르디메크르디 다이칸야마 플래그십 스토어

JOSEPH AND STACEY

다이마루 도쿄점 조셉앤스테이시 팝업 스토어

1
2
LACHIC

라시크 쇼핑몰 팝업 스토어
(마뗑킴, 드파운드 등)

JR Takashimaya

JR 나고야 다카시야마 팝업 스토어
(마지셔우드, 조이 그라이슨, 낫띵리튼 등)

1
2
XEXYMIX

젝시믹스 오사카 다이마루점

Hankyu

한큐 백화점 우메다 본점 팝업
(마뗑킴 · 안다르 · 아더에러 · 시티브리즈 등)

플래그십 매장으로 도심 접수

산발적인 팝업 매장을 넘어 아예 상설 매장을 낸 브랜드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6월 1일 도쿄 다이칸야마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낸 패션 브랜드 ‘마르디 메크르디’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패션 플랫폼 무신사 일본 법인을 통해 몇 차례 팝업을 진행한 후 일본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직진출했다. 박화목 마르디 메크르디 대표는 “팝업으로만 하루·이틀 만에 1억5000만~2억원의 매출이 나오고 재고가 없어 못 파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고 말했다. 현재 플래그십 매장도 주말 기준 하루 매출 1억 원대. 지난 3월 일본 패션 플랫폼 조조타운에 입점한 온라인 매장 매출까지 더해 “올해 일본에서만 총 150억원의 매출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흥행 면에서도 해외 명품 브랜드에 뒤처지지 않는다.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는 지난 3월 도쿄 아오야마에 플래그십을 내며 이 지역에 화제가 되고 있다. 입장하려면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가능할 정도로 매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선다. 이 지역은 프라다·티파니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도쿄 내에서도 손꼽히는 노른자 상권으로 매장 월세만 한 달에 3억~4억 원대다. 웬만한 브랜드가 매장을 내기 쉽지 않은 곳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지며 선전하고 있다.

한국 찾아 입점 상담회 열기도

일본 생활 잡화 유통 업체인 ‘로프트’는 지난해 10월과 올해 4월 두 차례 한국 브랜드 기획전인 ‘펀펀 서울’과 ‘K코스메 페스티벌’을 진행했다. 한국 뷰티·문구류·생활용품·패션잡화·캐릭터 브랜드를 한 번에 모아 소개하는 기획전으로, 오는 10월에도 같은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 5월 15일에는 로프트의 한국 페스티벌 담당자들이 한국을 찾아 입점 상담회를 열기도 했다. 이곳에서 인기 있는 화장품 브랜드로는 ‘티르티르’ ‘라카’ ‘라네즈’가, 잡화에서는 ‘조구만 스튜디오’, 문구에서는 ‘차니베어’ 등이 꼽힌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일본 유통 업체 ‘로프트’ 입점 1:1 수출 상담회. 하반기 한국 브랜드 기획전을 열기 위한 수주 상담회다. 사진 코트라 사진 코트라

이번 로프트 입점 상담회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주최했다. 김보혜 코트라 도쿄 무역관은 “최근 한국 브랜드를 소싱하고 싶다는 현지 업체의 연락을 자주 받는다”고 말했다. 한국 업체가 일본에 나가고 싶어 문의하는 경우가 많았던 과거와 정반대다. 특히 젊은 층에 유명하면서 일본에 아직 선을 보이지 않은 이른바 ‘미상륙 한국 제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예를 들어 올리브영·더현대 서울 등에 입점하고 서울 성수동에 팝업을 내는 등 실제 한국에서 잘 팔리는 브랜드가 일본에서도 ‘셀링 포인트’를 갖는 식이다.

일본의 화장품 수입 국가별 비중

한국
프랑스
미국
자료: KITA,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
(2023년 1월 기준)

일본 내 한국 제품의 선전은 실제 무역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23년 기준 일본 내 수입 화장품 중 우리나라 화장품이 21.6%를 차지하며 프랑스(19.8%)를 제치고 연속 1위를 유지했다고 지난달 밝혔다. 지난 2022년부터는 한국 화장품이 일본 내 수입 화장품 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STORY 2

한국에는 있는데, 일본에는 없는 것

“ 온도가 달라졌다.”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한국 브랜드 대표들은 최근 2~3년간처럼 사업하기 쉬웠던 때가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변화는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가속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OTT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분 이른바 ‘4차 한류’가 배경으로 꼽힌다. ‘K-컬처’에 대한 호감도가 기존 마니아층에서 대중으로 확대했고, 이는 한국이라는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 미스치프 공식 홈페이지 사진 미스치프

소비재로 퍼지는 ‘4차 한류’

한국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히 한국 음식과 패션·뷰티 등 라이프스타일로 퍼져나갔다. 주로 드라마나 아이돌 음악 등 문화 콘텐트에 머물렀던 그동안의 한류와 최근의 ‘4차 한류’가 명확히 다른 지점이다. 이제 일본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먹는 음식, 입는 옷, 바르는 화장품 등 라이프스타일에 기반을 둔 소비재를 궁금해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 4차 한류 붐

  • 1차 2003~2005 겨울연가, 배용준 열풍
  • 2차 2008~2010 K팝 그룹 카라, 소녀시대, 빅뱅 인기
  • 3차 2015~2018 BTS, 블랙핑크 인기와 함께 젊은 층 중심으로
    음식·문화 등으로 저변 확대
  • 4차 2020~현재 K팝 인기와 더불어 ‘기생충’,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등 OTT 콘텐트 중심으로 대중적 확산. 젊은 층 중심으로 한국 화장품·패션 등 인기
자료: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본지 분석

특히 한국 패션 브랜드의 위상 변화는 국내에서 먼저 감지됐다. 최근 몇 년간 서울 한남동과 성수동의 패션 매장 앞에 여행 가방을 든 외국인들이 줄을 서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됐다. 외국인 중에서도 일본인 매출 비중이 특히 높다. 한 캐주얼 브랜드는 주말 3일간 진행한 백화점 팝업 매장에서 전체 5억원의 매출 중 50%를 일본인 매출로 채웠다.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또 다른 캐주얼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에서는 한때 일본인 매출이 전체 월매출의 90%에 육박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 소비자들의 이 같은 호응은 자연스레 브랜드의 일본 진출로 이어지고 있다. 코오롱 FnC의 잡화 브랜드 ‘아카이브 앱크’는 지난 4월 첫 해외 진출국으로 일본을 낙점, 공식 온라인 몰을 열었다. “성수동 쇼룸을 찾은 일본인 쇼핑객들이 일본 매장 오픈을 문의하는 경우가 많아진 게 계기가 됐다”는 게 브랜드 관계자의 설명이다.

패션 브랜드 아카이브 앱크는 지난 4월 일본 공식 온라인 몰을 열었다. 사진 아카이브앱크 사진 아카이브앱크

명품과 SPA 사이

사실 일본은 패션 강국으로 통한다. 시장 규모가 국내보다 두 배 이상 큰 100조 원대로 추정된다. 이세이 미야케·요지 야마모토·레이 가와쿠보 등 세계적 디자이너들을 배출했고, 꼼데가르송·사카이 등 글로벌 브랜드부터 유니클로 등 세계적인 SPA(제조·유통 일괄형) 까지 두루 보유하고 있다. 이런 일본에서 K-패션 브랜드가 관심을 끌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

“K-팝의 영향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관심을 끌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파르코 시부야 점장 히라마츠 유고

한국 브랜드는 일본 패션 시장에서 비어있는 두 가지 지점을 공략한다. 우선은 가격대다. 지난달부터 일본 파르코와 더현대 글로벌 팝업스토어를 진행하는 박동용 현대백화점 상품본부 책임은 “백화점 중심의 명품과 중가 이하의 패스트패션이 장악한 일본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는 디자이너 감성에 적당한 품질, 합리적인 가격으로 중가 이상 고가 이하 시장을 공략한다”고 말했다. 박화목 마르디메크르디 대표도 “(일본 시장에는) 적당한 가격대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브랜드가 적다는 느낌”이라며 “무신사나·29CM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극심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한국 브랜드라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감각은 세계 수준, 가격은 적당

또 다른 강점은 새로움이다. 비싼 가격에 20년 전 감성을 유지하는 일본의 글로벌 브랜드의 빈틈을 한국 브랜드가 채워주고 있다. 일본 패션 업계의 전문가들도 한국 브랜드의 매력으로 ‘트렌디한 디자인’을 꼽았다. 과거 한국 브랜드는 로고를 전면에 세우거나 디자인보다는 아이돌에 기대는 이미지였다면, 최근에는 디자인 자체만으로 매력을 끈다. 특히 젊은 여성 고객들에게 ‘귀엽다’는 호응을 얻으면서, 이를 도입하는 일본 업체들도 늘어나고 있다는 게 다수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Y2K 등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하면
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 강점”

일본 패션 플랫폼 조조타운 브랜드 영업본부 마츠다 켄
일본 패션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 브랜드가 브랜드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강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사진은 젠틀몬스터 아오야마 플래그십 스토어 내부의 키네틱 오브제. 사진 젠틀몬스터

브랜드를 풀어내는 방식도 일본인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간다. 히라마츠 파르코 점장은 “서울 성수동에서 지상을 텅 비워 놓은 탬버린즈 매장을 보고 파리 퐁피두센터를 떠올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브랜드는 브랜드의 강점과 매력을 철저하게 표현하고 단번에 집중시키는 힘이 굉장하다”고 말했다. 이세탄의 한국 프로젝트 담당자인 미야지 사호씨도 “단순히 옷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테리어·식물·디스플레이 등 모든 것을 세심하게 전개해 그 브랜드 옷을 입은 사람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세계관 구축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SNS로 취향 대통합

사진 29cm 공식 홈페이지 사진 29CM

한국에 감각 좋은 신진 브랜드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달라진 점은 SNS라는 강력한 확산 플랫폼이 생겼다는 점이다. 도쿄에서 만난 한국 브랜드 소비자들은 대부분 친구의 인스타그램에서, 일본 내 인플루언서의 계정에서 한국 브랜드를 처음 접했다고 답했다. 실제로 한국 브랜드가 잘 되는 해외 시장의 공통점은 SNS 침투력이 높은 시장이다.

“최근 들어 SNS에서 한국 브랜드를
자주 접하다보니 빠져들게 된다”

파르코 마뗑킴 팝업 스토어에 방문한 39세의 한 일본인 여성

무엇보다 SNS로 취향의 대통합이 시작됐다. 한국의 길거리에서 유행하고 SNS에서 통하는 패션 콘텐트가 일본으로 동남아시아로, 미국으로 쉽게 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확산력이 높은 K-팝 콘텐트가 촉매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최근 해외에서 흥행하는 한국 브랜드는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나 무신사·29CM 등 온라인 플랫폼을 타고 성장한 작은 브랜드가 중심이다. ‘마뗑킴’ ‘마르디 메크르디’ ‘오픈와이와이’ ‘미스치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SNS를 활용해 브랜드 세계관을 확실히 구축하고 소통에 능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SNS 비주얼을 통해 단번에 폭발적으로 확산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일본 패션 플랫폼 조조타운은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무신사 팝업 스토어 페이지를 운영했다. 사진 조조타운 홈페이지 사진 조조타운

‘K’ 떼고도 생존해야

한국 패션 브랜드에게 있어 일본 시장은 무척 매력적이다. 시장 규모도 크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워 물류비용이 적게 들고 기후와 체형이 비슷하다는 이점이 있다. 여름 티셔츠 위주로 팔리는 동남아시아보다 객단가도 높다. 무엇보다 일본 시장은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 진입 전 교두보로 삼기 좋다.

“일본 내수 시장은 장벽이 높아 진입이 어렵지만, 일단 들어오면 유럽이나 미국 같은 더 큰 시장과
곧 바로 연결되는 글로벌 시장”

코트라 도쿄 무역관 부관장 이병욱

다만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한 과제도 분명하다. 중간 가격대에 개성 있는 브랜딩과 디자인으로 소구하지만 완성도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히라마츠 파르코 점장은 “(한국 브랜드가) 역시 본질이나 퀄리티(품질)는 아직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며 “더 위를 목표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평가했다. 허철 무신사 글로벌 본부장은 “한국 브랜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지금, 이들의 충성도를 사려면 지금보다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가격을 지나치게 올리지 않는 등의 영민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K-브랜드라서 좋은 게 아니라 K를 떼고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자체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숙제가 남는다.

STORY 3

새로 쓰는 K-패션 성공 방정식

한때 한국 패션계는 고민했다. 왜 우리에겐 세계적 패션 브랜드가 없을까. ‘파리 패션위크 진출’ 같은 형식적 타이틀에 얽매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물꼬’가 의외의 지점에서 터졌다. 이른바 ‘K-컨템(K-contemporary·동시대의)’으로 불리는 신진 브랜드의 선전이다.

사진 마뗑킴 공식 인스타그램 사진 마뗑킴

국내서 팔리니, 해외가 따라왔다

‘K-컨템’의 특징은 대기업 기획·생산 후 백화점에 유통하는 브랜드나,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가 아니다. 주로 SNS·블로그 등 온라인 기반에서 출발, 하고·무신사·29CM 등 플랫폼을 타고 확장했다. 무기는 시류를 읽는 상업적 능력. 젊은 층에 통하는 감성을 유지하면서 한정판·팝업·협업 등 시시각각 트렌드를 관통하는 콘텐트를 쏟아내며 성장해왔다.

최근 선전하는 K-브랜드는 SNS를 기반으로 출발해 온라인 플랫폼을 타고 확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사진 마뗑킴 사진 마뗑킴

주목할 건 이런 K-브랜드들이 해외시장을 ‘애써’ 공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외 시장만을 위한 전략을 세우거나, 제품을 만들지도 않는다. 국내에서 비즈니스를 했는데, 해외 소비자들이 따라오는 셈이다. 국내 매장에 방문이 계속되면서 해외 진출에 대한 요구가 역으로 이뤄진다.

50억에서 1800억으로

마뗑킴은 이런 K-브랜드의 성공 사례를 분석할 때 가장 첫 줄에 등장해야 할 브랜드다. 앞서 언급한 브랜드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해외에서도 먼저 찾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브랜드는 지난 2018년 연 매출 10억원의 작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출발, 2020년 무신사에 진출하면서 5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하고하우스의 전략·재무적 투자를 받으며 150억원으로 퀀텀 점프. 이후 2022년 500억원, 지난해 1000억원을 돌파했다. 1000억원은 국내 패션 시장에서 ‘메가 브랜드’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다. 브랜드가 밝힌 올해 추정 매출은 1800억원이다.

마뗑킴 매출 추이

  • 50억
  • 150억
  • 500억
  • 1000억
  • 1800억 추정
하고하우스 투자
(2021년 2월)
자료: 하고하우스

이런 성장세를 몰아 온라인 중심에서 오프라인으로 공격적인 외형 확장을 벌이고 있다. 현재 성수 플래그십을 비롯해 13개 백화점 매장을 운영하며, 멀티숍 ‘하고하우스’ 18개 매장에 입점해 있다. 오는 8월에는 서울 명동에, 9월에는 신사동 도산공원 인근에 추가의 플래그십 매장을 계획 중이다. 해외에서도 이에 못잖은 성장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서울 쇼룸을 찾는 외국인이 늘면서 일본 등 아시아 지역 주요 유통 업체로부터 ‘팝업’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고, 현지 패션 업체들의 판권 문의도 이어진다. 올 연말엔 홍콩·마카오에 매장을 오픈하고, 일본에도 이르면 내년 초 공식 진출에 나설 예정이다.

지난 4일 성수동 마뗑킴 사무실을 찾아 이동규 부사장을 만나 이례적 성장 비결, 그리고 주목받는 K-브랜드의 특징에 관해 물었다. 이 부사장은 국내 패션 대기업에서 20년 이상 상품기획자(MD)로 일하다가 지난해 5월 마뗑킴에 합류했다. 오랫동안 기성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만큼,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마뗑킴에 대한 소회가 남달랐다.

23년차 MD도 놀란 초고속 성장

지난 4일 서울 성수동 마뗑킴 사무실에서 이동규 부사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이동규 마뗑킴 부사장 사진 이동규 마뗑킴 부사장

Q. 빠르게 매출을 확장하고 있는데.

현재 매출만 보면 웬만한 대기업 여성복 브랜드보다 커졌다. 이 정도면 라인을 확장하다 못해 소위 ‘찢어야’ 한다.(웃음) 그런데 브랜드가 지닌 매력과 정체성이 명확하다. 품목을 다양화하다 브랜드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마련인데, 마뗑킴은 그렇지 않아서 신기하다.

Q. 기성 패션 브랜드와는 많이 다른가.

기존 내셔널 브랜드는 아무리 온라인에 강해도 매출에서 10% 비중을 넘지 못한다. 마뗑킴은 온라인 100%에서 시작해 현재 온라인 40%, 오프라인 60%까지 확장했다. 온라인으로 브랜드 팬덤을 확보하고, 오프라인으로 외형 성장을 하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O2O(온라인 to 오프라인) 전략인데, 이 부분이 절묘했다.

Q. 고속 성장 비결이 뭔가.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겠지만, 우선은 상품이다. 온라인 브랜드의 외형적 성장이 어려운 이유가 단품 위주 판매다. 마뗑킴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착장’ 할 수 있는 드문 브랜드다. 가방이나 지갑 같은 액세서리 판매 비중도 전체 매출의 40% 정도로 높다.

Q. 지난 2021년 하고하우스의 투자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은데.

매출을 순식간에 1000억원까지 올리는 데는 적시에 펼친 오프라인 전략이 주효했다. 코로나19가 끝나면서 조금씩 오프라인에 대한 필요가 올라올 때 오프라인 매장을 공격적으로 늘리면서 소비자 접점을 늘렸다. 이 과정에서 하고하우스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단순 재무 투자가 아니라 리테일·소싱 등 전문 패션 인력을 투입했다.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마뗑킴의 오프라인 쇼룸 ‘하우스바이 성수’는 외국인들 사이 이른바 ‘K패션의 성지’로 불린다. 사진 마뗑킴 공식 인스타그램 사진 마뗑킴

Q. 하고하우스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뭔가.

규모가 작은 단일 브랜드가 할 수 없는 패션 사업 전 밸류 체인의 역량을 지원한다. 예를 들어 온라인 브랜드의 경우 봄·여름 티셔츠·셔츠는 잘 만든다. 그런데 가을·겨울용 코트·재킷은 아무래도 생산 역량이 떨어진다. 하고하우스의 전문 인력 중 상품기획자들이 붙어 원단 소싱부터 수량 산정, 협력업체 관리까지 돕는다. 백화점 유통망 확장도 작은 브랜드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리테일 전문가 투입은 물론, 오프라인 채널 전개를 위한 상품 기획 시스템을 만들기도 한다. 단순 자금 지원이 아니라 경영전략·재무·마케팅·리소스를 전폭 제공해 말 그대로 브랜드를 키우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마뗑킴의 하이엔드 라인 ‘킴 마틴.’ 섬세한 디자인과 테일러링,고급 소재가 돋보인다. 사진 마뗑킴 공식 인스타그램 사진 마뗑킴

Q. 마뗑킴의 주요 상품 기획 전략이 있다면.

티셔츠가 워낙 유명하지만, 짜임 소재 재킷이나 겨울 코트 등을 보여줄 수 있는 하이엔드 버전인 ‘킴 마틴’을 론칭했다. 또, 일본에서 팝업을 네 번 했는데, 매번 남성 고객들이 와서 큰 사이즈 티셔츠를 사 가더라. 국내에서도 남성 라인을 내 달라는 요청이 많아, 지난달 마뗑킴 맨즈 라인을 출시했다.

내가 입고 싶은 옷 만든다, ‘기민한’ 조직

Q. 전체 직원이 39명이라고 들었다. 매출에 비해 적은 편 아닌가.

기성 브랜드처럼 조직을 전문화·세분화해 규모를 늘리면 지금 같은 시너지가 나지 않을 것 같다. 디자인팀은 디자인만 하고 마케팅팀은 마케팅만 하고 외부 행사는 외주 주고 그런 식이 아니라 팝업을 하나 해도 디자인팀이 방향키를 잡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진짜 크리에이티브 조직처럼 일한다.

마뗑킴 성공의 배경으로는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고 강한 크리에이티브 조직이 꼽힌다. 사진 마뗑킴 공식 인스타그램 사진 마뗑킴

Q. 요즘 흔히 말하는 ‘애자일’ 조직인가.

맞다. 작지만 강한 이유가 마뗑킴은 만드는 사람들은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 내셔널 브랜드에 있을 때, 디자이너가 한참 자기 브랜드 옷 디자인하다가 퇴근할 때는 소위 명품 브랜드를 입고 퇴근하는 풍경을 숱하게 봤다.(웃음) 여기는 자기 디자인을 실제 입는 사람들이 모인 ‘원팀’이다. 2030들이 실제 입고 싶은 옷을 만드니 또래 소비자들이 반응한다.

패션 시장의 판이 바뀐다

사진 마뗑킴 공식 홈페이지 사진 마뗑킴

Q. K-브랜드에 해외 소비자들이 반응하는 이유가 뭘까.

올해 1월쯤 ‘마뗑킴 일본에서 대박 났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현지에서 다들 ‘마뗑킴, 마뗑킴’ 한다고.(웃음) 이유를 물어보니 일본의 젊은 친구들은 일본 옷이 비싸고 지루하다고 생각한단다. 한국 브랜드들이 지금 20대들이 좋아할 트렌디한 옷을 만든다는 단순한 전략이 통했다고 본다.

Q. 해외 시장 전략이 있나.

해외만을 겨냥하는 전략은 없다. 우리의 기본은 정확히 한국이다. 한국이 잘 돼야 해외를 가도 잘 될 수 있다. 물론 볼륨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해외 진출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홍콩·마카오·대만은 이미 현지 유통 업체와 계약이 끝났고, 일본도 내년 초쯤에는 나갈 예정이다.

Q. 요즘 잘 되는 K-브랜드 특징이 뭘까.

패션 시장의 판이 바뀌고 있고, 이 판에 맞는 브랜드들이다. 사실 마뗑킴이 백화점에 들어갈 때 고민했던 부분이 ‘몇 층에 들어가나’ 였다. 기존 분류대로라면 영패션인가, 아니면 컨템포러리인가, 스트리트 브랜드인가. 따지고 보니 규정할 수가 없는 거다. 경계가 없는 게 요즘 소비자, 요즘 브랜드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내셔널이든 컨템포러리든, 흔들리지 않는 브랜드 정체성과 기민하게 트렌드를 따라가는 상품력이 전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