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스러운 ][ 사랑스러운 ] [ 사랑스러운 ][ 사랑스러운 ]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What makes a city thrive?

상상력이 빚은 도시

상전벽해, 꿈의 공간으로 거듭나다
여름마다 물에 잠기는 땅, 논과 밭만 펼쳐진 공간, 낡고 낮은 건물만 스러져가던 쇠락한 해변 도시. 이런 곳을 보며 누군가는 첨단 도시를 그립니다. 마에스트로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거장이 위대한 영화를 만들듯, 누군가의 위대한 상상력과 강력한 추진력이 꿈의 공간을 건설합니다.

여의도

1967

너의 섬, 여의도

“너나 가져라." 서울 여의도는 그 이름처럼 버려진 섬이었습니다. ‘불도저 시장’으로 불린 김현옥 전 서울시장은 둑을 쌓아서 거대한 수변 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전까지 국내에서 대규모 제방 공사 경험은 전무했습니다. 1968년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한강 둑을 쌓아 올리면서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기술력으로 볼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여의도

1967

비만 오면 잠기는 애물단지 땅. 수중도시라도 세워야 할까요. 개발 전 여의도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주민 443명이 살았던 밤섬은 여의도보다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물길을 트려고 밤섬을 폭파시켰고, 그 흙과 돌로 여의도에 제방을 둘렀습니다. 흙과 모래가 실려오며 다시 얼굴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엔 잡초투성이 야산과 논밭이었습니다. 인구는 수 만 명에 불과했고 여름이면 물난리가 일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강남에선 남편ㆍ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까지 있었을까요.

국내 최초의 비행장이자 공항이었습니다. 일제 시대인 1916년에 생겼고 1971년 성남으로 이전하기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일본비행대회에서 일본인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던 약관의 조선인 안창남의 비행을 보려고 구름같은 관중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커다란 광장이자 공원같은 곳이었습니다. 서울 유권자가 70만명이던 1956년 대선 유세 때 30만명이 한강 백사장에 몰려들 정도였습니다. 강북으로 출퇴근하는 회사원, 등교하는 학생들은 아침저녁으로 나룻배를 타고 다니기도 했죠.

“서울은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팻말을 세워놓고 전쟁처럼 치열하게 건설한 한강 최초의 제방입니다. 68년 준공식은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불꽃과 비둘기가 하늘을 수놓는 국가적 행사로 치러졌으니, 윤중제의 중요성이 짐작가시죠.

1988

2.9㎢(90만평) 모래밭이 도시가 됩니다. 1971년 5ㆍ16광장(여의도광장), 1975년 국회의사당이 들어섰습니다. 1985년 당시 아시아 최고층 건물 63빌딩(한화빌딩)이 완공됐습니다.

한강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강이 된 건 여의도를 시작으로 한 제방공사 덕택이었습니다. 그전까지 한강은 장마가 오는 여름엔 강폭이 2km를 넘었지만, 가뭄 땐 50m밖에 안 되기도 했습니다.

여의도 입주신청 1호 건물입니다. 당시 국회의 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의사당 인근인 여의도 서쪽엔 높은 건물이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높은 건물은 대부분 여의도 동쪽에 있습니다.

1985년 준공 당시 아시아에서 최대 높이의 건물로 그 위용이 대단했고 국민들에게 자부심도 심어준 건물입니다. 이름처럼 63층까지 있는 건 아니고, 지상 60층, 지하 3층을 더해 총 63층입니다.

비상군용비행장으로 기획된, 거대한 아스팔트 광장이었습니다. 이산가족찾기 당시 만남의 광장이 바로 이곳입니다. 한 종교집회엔 200만명이 모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국내 최대ㆍ최고를 자랑하는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1971년 완성됐습니다. 13층 높이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된 아파트는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공작ㆍ한양ㆍ광장 아파트 단지도 들어섰습니다.

2020

누구나 다 아는 여의도의 현재입니다. 빈 섬에 세웠다고는 믿기 힘든, 한국의 맨해튼이 됐습니다.

따릉이를 제일 많이 빌리는 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바로 여의나루역 1번 출구입니다. 자전거뿐 아니라 수많은 연인과 산책하는 시민으로 붐비는 명소입니다. 야경도 아름다워서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 같습니다.

윤중제 위에 만들어진 길입니다. 윤중로에 핀 벚꽃은 1971년 한 재일동포가 전달한 묘목을 서울시청 직원들이 일일이 심은 것입니다. 벌써 이 벚꽃나무들의 나이도 쉰이 됐네요.

초고층 빌딩숲의 원조는 여의도입니다. 85년 63빌딩을 시작으로 해마다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은 조금씩 키를 높였습니다. 지금도 건설 예정 중인 초고층 건물들이 많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뒤 여의도의 모습은 또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네요.

여의도를 시작으로 한강 전역에 제방이 생기면서 비만 오면 물에 잠기던 강남은 세계적인 도심으로 변모했습니다. 지난 50년 간 세계에서 가장 몰라보게 달라진 곳을 뽑으라면 여의도와 강남이 선정되지 않을까요.

2020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스카이라인이 유독 멋진 야경을 만들어냅니다. 불꽃축제가 야경에 찬란함을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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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EL OPER

도시 기획자, 디벨로퍼

도시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100년 이상을 내다본 인간의 상상력이 만듭니다. 도시를 만드는 사람을 디벨로퍼라 부릅니다.

NEW CITY

디벨로퍼는 버려진 땅의
잠재력을 알아봅니다.
모두가 포기한 땅을 일궈서
도시로 성장시킵니다.
디벨로퍼의 상상력과 비전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일산 식사

1990

디벨로퍼의 꿈이 지은 신도시

일산 식사지구만큼 놀랍게 변신한 신도시는 드뭅니다. 한때는 아무도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이곳에 무리지어 살았습니다. 공권력도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허가 건물이 빼곡했고, 어둑해지면 무법지대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DSD삼호 김언식 회장의 상상력과 추진력이 이곳을 경기 북부의 인기 주거단지로 변모시켰습니다.

일산 식사

1990

고양은 군이었고 일산은 읍이었던 시절. 일산 식사동에 명품 주거 단지가 들어서리라는 걸 상상한 사람이 있을까요.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가구업체들이 언젠가부터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무허가업체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한때 수도권을 대표하는 유명한 가구 단지였지만, 하나의 도시 브랜드로 자리잡지는 못했습니다.

사회적 소외 계층이 모여 살았지만, 행정기관도 관리하기 힘들어 방치한 곳이었습니다. 마을 입구엔 바리케이드가 서 있었습니다. 소방도로 같은 기반 시설도 없어서 주거 여건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전체 면적 160만㎡(50만평) 중 65%가 보존녹지였습니다. 한해 콩 두 가마니쯤 나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신도시가 한창 건설되던 일산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생계를 위해 닭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단속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에 축사에서 나온 오폐수 문제도 많았습니다. 도시의 외곽 중에서도 삶의 수준이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였습니다.

2020

사업비 3조4000억원이 투입된 식사 지구는 최고급 단지와 교육 여건을 갖춘 신도시 ‘일산 위시티’로 탈바꿈했습니다.

전국 최초의 국제고등학교 등 초등학교 2곳, 중학교 2곳, 고등학교 1곳에 학원가까지, 일산의 대치동이라고 불립니다. 2017년 부동산114 조사에 따르면 식사지구 주민 평균 연소득은 6511만원으로 서울 강남구의 5501만원보다 높습니다.

위시티 중 일산 자이의 조경 수준은 국내 최고. 평균 1000만원 짜리 명품 소나무 2200여 그루를 심었고 조경 공사비만 600억원이 들었습니다. 소나무 뿌리가 다칠까봐 이식 작업에 1년을 들였습니다. 황금빛 공주석은 중국 산둥성에서 수입했습니다. 테마별 정원 100여개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2011년 세계조경가대회에서 최고상인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아파트 모든 단지가 산책로를 통해 연결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소통이 활발합니다. 커뮤니티가 자생적으로 생겨났고 다양한 동호회가 활발히 활동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성공한 곳입니다.

2020

밤길 무섭던 땅은, 이제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가 됐습니다. 주변 조명과 함께 빛나는 경관을 자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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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풍무

1990

김포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공항? 신도시? 하지만 예전엔 평야로 유명했습니다. 김포의 논에서 나온 쌀 통진미는 조선시대 임금의 수랏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서울 인구가 폭증하면서 주택이 부족해지자 논밭을 갈아엎고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급하게 아파트 단지가 생겼지만, 모든 아파트 단지가 같은 생활 여건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디벨로퍼 DSD삼호가 손대기 전까지는 말이죠.

김포 풍무

1990

김포평야입니다. 논밭과 옹기종기 모인 집들, 저기 비닐하우스도 보이네요. 여름엔 초록빛, 가을엔 황금빛으로 물듭니다. 가을이면 기러기떼가 쉬어 갔지요.

지금이야 김포평야가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들판이었지만, 이 당시에만 해도 김포에는 널찍한 논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김포평야 중에서도 유명한 홍도평야가 이 부근입니다. 한강물과 뒤섞여 붉은 갯벌이 펼쳐져 홍도평야라고 불렀습니다.

이 부근은 기러기떼가 몰려들기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기러기가 모여들어 낱알을 주워먹는 진풍경도 볼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죠.

2020

2010년대부터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변변한 마트도 없었죠. 2016년 DSD삼호가 풍무푸르지오를 지으면서 대형마트ㆍ영화관ㆍ공원 인프라도 함께 들여왔습니다.

DSD삼호가 시행한 대단지 아파트입니다. 이 일대 생활의 혁신을 가져온 마중물입니다. 보통 신도시는 대단위 아파트를 통해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변 편의시설과 기반시설이 확충됩니다. 규모의 경제인 셈이죠.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장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김포 풍무에 제대로 들어선 대형마트입니다. 대단지가 생기면서 들어왔습니다. 번듯한 편의시설이 들어서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강신도시에서 김포공항역까지 김포도시철도(김포골드라인) 약 24km 구간이 개통됐습니다. 김포는 오랜 기간 철도도 없었고 도로도 부족해 수도권 교통 인프라가 매우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도시철도가 개통되면서 김포 풍무의 가치도 올랐습니다.

2020

가로등도 제대로 없어서 밤길 걷기가 힘들었던 한적한 시골 마을이 모든 요소가 갖춰진 아파트 단지가 됐습니다. 논에 물을 대주는 김포대수로와 좁다란 국도인 김포대로만이 30년 전의 그곳과 이곳이 동일한 장소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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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

1980

해운대의 야경을 발명하다

30년 전만해도 자랑할 만한 것은 백사장 하나뿐이었습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해운대에는 스카이라인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해운대는 신시가지, 센텀시티, 마린시티까지 첨단도시의 이미지와 함께 고급 휴양지의 느낌이 물씬 납니다. 할리우드 영화 촬영을 위해 방문하는 아름다운 미래도시 해운대의 꿈은 언제부터 꾸게 된 것일까요.

부산 해운대

1980

널찍한 백사장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습니다. 요트경기장과 달맞이고개는 있었지만 야경도, 스카이라인도 없었습니다.

벚나무가 아름다운 달맞이 고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건 1983년 여름 무렵이었습니다. 해운대구 공무원들이 조를 짜서 길을 트고 돌을 쌓고 벚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외국인도 들르는 명소가 됐죠.

지금의 센텀시티가 들어선 금싸라기 땅입니다. 하지만 30년전 만 해도 군용 항공 기지로 쓰였습니다. 비행장 사용이 중단된 뒤엔 개발 구역에서 제외된 채 아무 것도 없는 야적장으로 방치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첨단 시설에 밀려 초라한 외관으로 비춰지지만, 당시엔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까지 치러낸 부산의 명소였습니다. 1982년 수영만 매립 사업 계획이 세워졌고, 1986년 요트경기장이 완성됐습니다. 해운대에 사실상 최초로 들어선 현대적 시설입니다.

해운대가 개장한 건 1965년이었지만 관광 특구로 지정된 건 1994년입니다. 그러니 90년대엔 부대 시설과 편의 시설이 썩 흡족할 정도로 있지는 못합니다. 해마다 백사장이 감소하고 있어 요즘은 매년 모래 2800㎥를 투입해 인위적으로 모래밭을 만들고 있습니다.

2020

1998년까지만 해도 부산 최고층 아파트가 15층이었다는 사실 아셨나요. DSD삼호 김언식 회장은 “해운대가 홍콩보다 못한 게 뭐냐”며 공무원들을 설득했죠.

휘황찬란한 해운대 스카이라인을 가능케 한 건물입니다. 홍콩보다 아름다운 야경을 꿈꾼 DSD삼호 김언식 회장의 작품입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직접 만나 이름 사용 허가를 얻었습니다. 이 건물을 시작으로 고층건물이 들어서면서 해운대의 야경이 완성됐습니다.

과거 군용 항공 기지였지만 컨텐이너 야적장으로 쓰이다 2000년부터 개발이 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벡스코,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 영화의 전당, APEC 나루 공원이 조성된 완벽한 신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수영만 매립지에 조성된 초고층 주상복합건물 단지입니다. 이곳은 해운대의 여러 신도시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백섬과 광안대교에서 보는 스카이라인이 장관이어서 촬영 스팟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광안대교는 해운대의 야경을 한층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매력을 갖췄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블랙팬서’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위용이 국제적이라고 할 만 하죠. 부산 여행의 첫손가락에 꼽히는 셀카 명소입니다.

2020

이제는 홍콩의 야경도 부럽지 않습니다. 수많은 고층건물들이 뿜어내는 빛과 이를 반사하는 해운대 앞바다의 물결은 넋을 빼놓을 만큼 매력적이죠. 누군가의 꿈과 열정이 없었다면 해운대의 야경도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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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SPACE DEVEL OPER

주요 연혁

  1. 1980

    삼호주택
    설립

  2. 1993

    DSD삼호 사옥
    (마라톤빌딩)

  3. 2002

    용인 마북 삼성래미안
    1282세대

  4. 2007

    부산 우동 트럼프월드마린
    454세대

  5. 2010

    고양 일산 자이 1차
    4683세대

  6. 2016

    김포 풍무 2지구
    풍무푸르지오 1차
    2716세대

  7. 2018

    김포 풍무 2지구
    풍무푸르지오 2차
    2467세대

  8. 2019

    용인 동천 자이 2차
    1057세대

  9. 2020

    고양 일산 자이 2차
    802세대

  10. 2022

    고양 일산 자이 3차
    1333세대

국가대표 '디벨로퍼'
올해 40주년을 맞는 DSD삼호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4만여 가구를 공급한 국가대표 디벨로퍼로 성장했습니다. 허허벌판이었던 일산 식사, 김포 풍무를 첨단 신도시로 바꿨습니다. DSD삼호의 트럼프월드마린을 시작으로 해운대의 스카이라인이 그려졌습니다. DSD삼호는 100년 앞을 내다보고 공간을 기획하고 새로운 도시를 창조했습니다.

철학과 가치

원칙

DSD삼호의 원칙.

공공택지와 집단 상가 분양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주택지로 가공된 공공택지 사업은 짧은 시간 내에 큰 리스크 없이 수익을 낼 수는 있지만, 정해진 대로 지어야 하기에 큰 가치를 더할 수 없습니다. 지역의 미래가치와 주거문화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개발사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회사가 진짜 디벨로퍼입니다. 경기에 따라 고객에게 리스크를 지우는 집단 상가 사업도 하지 않습니다.

DSD삼호 김은희 부장
열정

DSD삼호의 열정.

아름다운 해운대 스카이라인은 DSD삼호의 열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해운대가 홍콩보다 못한 게 뭐냐. 충분히 홍콩의 아름다움을 뛰어넘을 잠재력이 있다”며 홍콩 야경 사진을 들고 다니며 부산 공무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1990년대 말 15층을 넘지 않던 바닷가아파트의 층고완화 허가를 받을 수 있었고, DSD삼호가 개발한 대우트럼프월드마린을 시작으로 해운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마천루로 거듭났습니다.

즐거움

DSD삼호의 즐거움.

수만 번의 숙고와 검토를 통해 새 단지를 완성했을 때의 짜릿함

죽을 만큼의 고생을 이겨내고 이룬 성공의 짜릿함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어려운 과정을 뚫고 사업을 완성하려면 절대적으로 이 일을 즐겨야 합니다.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DSD삼호는 무조건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을 채용합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거대한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DSD삼호의 꿈.

풀서비스가 가능한 복합 단지의 꿈

단지 내에 학교, 병원, 호텔, 위락시설 등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풀서비스가 가능한 복합개발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첨단 기술과 자연경관이 조화되고 예술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디자인하고 싶습니다. 국내에서만 상상을 펼치는 것이 아닌 인도네시아, 베트남, 이라크 등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상상들을 실현해보기 위해 해외 신개발국 등에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DSD삼호 김언식 회장
미래가치

DSD삼호의 미래가치.

고객에게 분양가 이상의 가치를 돌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아파트는 아무리 잘 지어도 시간이 흐르면 낡아가며 가치가 떨어지지만, 조경은 주변에 꽃과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면서 숲을 이루고 점점 그 가치가 올라가는 매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양 ‘일산 자이’입니다. 조경뿐 아니라 산책 공간을 사슬처럼 엮어 단지 주민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도시문화를 창출했습니다.

DSD삼호 엄준석 차장
정책기여

DSD삼호의 정책기여.

집값 상승을 막기 위해 도심 개발에 주력해야 합니다.

대다수 국민은 외곽 신도시가 아니라 생활 인프라가 충분한 도심에 거주하려는 욕구가 강합니다. 재개발ㆍ재건축 때 용적률을 대폭 완화하고 늘려주는 대신 소규모 임대주택을 건설하면 됩니다. 과거 임대주택의 실패는 소득 차이가 많이 나는 이들을 한 단지에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청년과 신혼부부 위주로 기회를 주면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DSD삼호 김언식 회장

국내 최고 디벨로퍼에 대해 더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