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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지연이 이야기
솔이 엄마 이야기
열두 살 민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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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지연이 이야기

진단방랑,
아픈데 병명을 몰라요

열 살 지연이 이야기

열 살 지연이(가명)는 뛰어 논 기억이 없다. 생후 100일 무렵부터 목을 잘 가누지 못했고, 또래가 걷기 시작할 즈음엔 잘 서지 못하는 증세로 이어졌다. 잘 넘어지고 숟가락을 종종 떨어뜨릴 만큼 근육 힘이 약해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했다.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냥 ‘희귀병’ 환자였다.

지연이 가족은 병명을 알기 위해 전국 유명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과 컴퓨터 단층촬영(CT) 등 온갖 검사를 다 받았지만 “뇌병변이 의심된다” 정도의 소견만 받았다. 지역 대학병원에서 100만원을 내고 받은 유전자 검사도 소용이 없었다.

10년… 진단방랑이 끝나자 치료 길이 열렸다

10년간 병명도 모른 채 지냈던 지연이 가족에게 2023년 2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연이가 앓고 있는 희귀병이 ‘세가와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세가와병은 특정 유전자 이상으로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는 병이다. 파킨슨병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질환이다. 전국에 환자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고, 유병자가 200명 이하라 극희귀질환이다. 특히 지연이 증세는 세가와병 중에도 매우 드문 유형이라고 한다.

지연이가 10년간 찾아다닌 ‘상세불명 질환’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서울대병원의 유전체 분석 검사를 통해서다. 검사를 권유하고 그 결과를 정확히 해석한 의료진 덕분이다.

병명을 알게 된 지연이는 처음으로 약을 먹을 수 있었다. 지연이 엄마는 “재활로 극복될 줄 알았는데 달라지는 게 없어 5년 지났을 땐 내려놓게 됐다. 이제 병을 알았으니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진단방랑이 끝나자, 치료 길이 함께 열렸다.

지연이의 병명을 확인한 그 이면에는 커다란 ‘마중물’이 있었다. 바로 이건희 기부금이다.

이건희 기부금

3000억원의 나비효과

희귀질환이나 소아암과의 싸움은 획기적인 연구비를 투입해야 가시적인 진전이 가능하다. 넥슨재단이 어린이공공재활병원을 짓는 데 100억원을 기부했던 식으로 말이다.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에 들어온 민간 기부는 2022년 기준 10억원 정도다. 병원과 사회복지법인으로도 산발적으로 돈이 모이지만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게임 체인저가 된 건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이다. 2021년 유족은 유산 가운데 1조원을 의료사업에 기부했다. 감염병 연구에 쓸 7000억원을 국립중앙의료원에, 소아암과 소아 희귀질환에 쓸 3000억원을 서울대병원에 기부했다. 삼성서울병원이 아니라 공공의료기관에 책임과 권한을 맡긴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전국 주요 어린이병원과 어떻게 나눠 써야 유족 뜻대로 소아 환자들에게 고른 혜택을 줄지 2년간 고민했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의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 사업단’은 전국 전문가와 머리를 맞댔다. 그 고민의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열 살 지연이 이야기

열 살 지연이의 꿈

진단방랑,
아픈데 병명을 몰라요

희귀병, 의사 혼자 풀 수 없는 난제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지연이처럼 검사를 지원받은 희귀병 어린이 환자가 지난달까지 500명 정도다. 학계는 밝혀진 희귀병만 8000여 개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수천여 개 있는 것으로 본다. 희귀병 진단이 어려운 건 의사 한두 명의 노력으로는 밝혀내기 힘들어서다. 환자와 의사가 1대1로 진단하는 방식으로는 희귀병을 밝혀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희귀병 진단을 목표로 거액이 투입된 프로젝트에서는 최종 진단이 내려지기까지 4~6개월에 걸친 추가 검증 등이 가능하다. 채종희(소아청소년과 교수) 서울대병원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 희귀질환사업부장은 “유전체 검사 비용뿐 아니라 유전자 기능을 연구하는 팀들의 노하우, 실험 등이 투입된다. 이런 건 이건희 기부금이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렇게 많은 아이가 지원을 받고, 수천~수만 명의 데이터가 모여 데이터베이스(DB)화하면 미래의 새로운 치료제를 만드는 기본을 다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희귀병 해결의 열쇠,
연구 네트워크와 플랫폼 구축

서울대병원의 임상 경험과 치료 가이드라인을 지역 병원과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도 기부금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채종희 교수는 “정보를 지역의 어린이병원 선생님들과 잘 나눠 지역에서도 경험을 공유하도록 연구 플랫폼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며 “지역에서도 희귀질환에 관심 있는 젊은 전문가를 양성해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 환자가 서울에 오지 않고도 빠르게 진단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건희 기부금이 투입되는 각종 프로젝트는 앞으로 10년간 지연이 같은 희귀병 환자와 소아암 환자 약 1만7000명에게 직·간접적인 혜택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과제도 163건이 정해져 올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참여 병원(사업 간 중복 포함) 144곳, 관련 인력 848명이 투입된다.

채 교수는 “앞으로 치료제를 개발하고 유전자 맞춤 치료를 하면서 한국이 4차 바이오산업의 정상에 서는 데 이건희 기부금이 탄탄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건희 기부금

어디에 쓰이나

  • 600억원

    희귀질환

    유전체, 기능연구 기반 희귀질환을 발굴하고 연구한다. 희귀질환 진단과 첨단기술 치료 지원에도 투입된다. 희귀질환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전국 임상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한 이유다. 국내 극희귀질환의 코호트 연구에도 기부금이 쓰인다.

  • 1,500억원

    소아암

    소아암 위험군별 치료법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고, 획기적인 백혈병 치료법인 카티(CAR-T)를 국산화한다.
    표준 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겐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분자종양보드’로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한다. 희귀 소아 고형암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 625억원

    공동연구

    서울대병원뿐 아니라 희귀질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전국의 연구자들을 참여시키는 사업이다.
    소아 희귀질환 임상연구를 지원하고, 다기관 공동연구 인프라를 만든다. 소아 특화 공공 데이터 모델을 구축해 글로벌 임상연구 중심이 되는 게 목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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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가족에게도
    둘째 희망이 보여요

  • 소아암과의 싸움
    언제 끝날까요

이 기사에 사용된 이미지는 스테이블 디퓨전 AI로 추출한 가상의 사진 혹은 소스를 재가공해 만든 그림입니다.

솔이 엄마 이야기

우리 가족에게도
둘째 희망이 보여요

솔이 엄마 이야기

솔이는 2021년 4월 세상을 떠났다. 태어난 지 100일이 채 안 됐을 때다. 엄마 김모(32)씨는 솔이를 가졌을 때 일반적인 산전 검사에다 고위험 산모가 하는 정밀검사까지 했다.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솔이는 태어나자마자 중환자실로 이송돼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뇌·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손발이 기형이었다. 병명도 모른 채 출산 전후 다섯 군데의 병원을 돌았지만 허사였다. 검사비만 400만원가량 들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손을 잡고 말을 건넬 수도 없었던 아이.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을 떠난 솔이는 그렇게 영영 떠나버렸다.

온 가족 유전자 검사 끝에 찾아낸 희망

김씨는 솔이를 보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솔이를 보낸 이유조차 모르는데, 또 아이를 갖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새로운 희망이 찾아왔다.

“유전자 변이를 찾았습니다.”
솔이가 떠나기 한 달여 전 추진했던 유전자 검사의 결과였다.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솔이와 김씨 부부의 혈액, 추가로 채취한 양가 조부모 혈액 등 7명의 유전자를 샅샅이 뒤져 1년 8개월여 만에 문제의 유전자 결실(일부가 빠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병명은 ‘뇌량 무형성증 및 뇌이랑비대증’이었다.

채종희(소아청소년과 교수) 서울대병원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 희귀질환사업부장은 김씨에게 “이제 둘째를 가지는 게 어떠냐. 착상 전 검사, 산전 검사를 해서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겠다”고 설득했다.

이후 김씨의 삶은 달라졌다. 김씨는 용기를 냈다. 몸 만들기에 집중했고, 9월 중순 임신에 성공했다. 13주차에는 유전자에 문제가 없는지를 검사할 예정이다.

서울대병원이 유전자 변이를 찾아낸 이면에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바로 이건희 기부금이다.

이건희 기부금

3000억원의 나비효과

희귀질환이나 소아암과의 싸움은 획기적인 연구비를 투입해야 가시적인 진전이 가능하다. 넥슨재단이 어린이공공재활병원을 짓는 데 100억원을 기부했던 식으로 말이다.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에 들어온 민간 기부는 2022년 기준 10억원 정도다. 병원과 사회복지법인으로도 산발적으로 돈이 모이지만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게임 체인저가 된 건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이다. 2021년 유족은 유산 가운데 1조원을 의료사업에 기부했다. 감염병 연구에 쓸 7000억원을 국립중앙의료원에, 소아암과 소아 희귀질환에 쓸 3000억원을 서울대병원에 기부했다. 삼성서울병원이 아니라 공공의료기관에 책임과 권한을 맡긴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전국 주요 어린이병원과 어떻게 나눠 써야 유족 뜻대로 소아 환자들에게 고른 혜택을 줄지 2년간 고민했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의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 사업단’은 전국 전문가와 머리를 맞댔다. 그 고민의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솔이 엄마 이야기

솔이 엄마의 꿈

우리 가족에게도
둘째 희망이 보여요

150명 병명 찾은
소아희귀질환 진단연구팀

기부금 용처가 정리된 뒤 병원 측은 소아희귀질환 진단연구팀을 꾸렸다. 솔이 같은 희귀질환은 세계에서 1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드물다. 소아과 임상 의사만으로는 찾아내기 불가능하다. 유전자 분석 경험이 풍부한 임상전문가, 바이오 정보 처리 전문가, 진단검사의학 전문가, 생명과학자 등이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유전자를 통째 검사하는 트리오 엑솜 검사로 부모·조부모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하고, 여기에서 소아 환자의 변이가 왔는지를 찾아갔다. 보통 6개월 가량 걸리고 500만~1000만원이 들지만 솔이 사례는 시간과 비용이 더 들었다. 건강보험 적용은 안 된다. 채 교수는 “유전자를 대규모로 분석하고, 알고리즘을 개발해 외국 것과 결합하는 등 정말 어렵게 찾았다”고 했다.

서울대병원은 삼성서울·경북대·양산부산대·전남대·충남대 등 전국 어린이병원 16곳과 함께 병명조차 모르는 환자 737명과 보호자 1422명의 유전자를 검사했다. 그 결과 솔이를 포함해 150명의 질병 원인을 밝혔다. 150명 중 4~5명만 같은 병이고, 나머지는 다 다르다. 바라이서-윈터 증후군(Baraitser-Winter syndrome), 아르볼레다-탐 증후군(Arboleda-Tham syndrome), 보쉬-분스트라-샤프 시신경위축 증후군(Bosch-Boonstra-Schaaf optic atrophy syndrome) 등 이름도 어려운 병들이다. 한국에서 처음 발견된 희귀질환도 상당수였다.

솔이 엄마, 다시 엄마가 될 꿈을 꾸다

150명이 병명을 찾아 헤매던 ‘진단방랑’에 마침표를 찍었다. 부모들은 원인을 알게 된 것에 우선 안도한다. 의료진은 다음 단계로 치료법 탐구에 들어간다.

이진숙 서울대병원 소아희귀질환사업부 진료교수는 “트리오 엑솜 검사에서 답을 찾을 확률이 30~40%인데, 답을 못 찾았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세포연구·동물연구를 계속하는데, 이 과정에는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며 “필요할 경우 전국의 제브라피시(잉어과 어류)·초파리 전문가 등과도 협업한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소아암 분야 42건, 희귀질환 19건, 공동연구 105건이 진행된다. 100개 의료기관, 1059명의 의료진이 달라붙어 있다.

채종희 교수는 “이 모든 게 기부금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미(未)진단 희귀질환 분야에서 한국이 글로벌 임상 연구의 중심이 될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엄마가 될 꿈을 다시 꾸게 된 김씨는 말했다.
“설레고 떨려요. 아이를 다시 갖는다는 게 무서웠는데 이 전 회장님과 의료진이 희망을 줬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건희 기부금

어디에 쓰이나

  • 600억원

    희귀질환

    유전체, 기능연구 기반 희귀질환을 발굴하고 연구한다. 희귀질환 진단과 첨단기술 치료 지원에도 투입된다. 희귀질환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전국 임상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한 이유다. 국내 극희귀질환의 코호트 연구에도 기부금이 쓰인다.

  • 1,500억원

    소아암

    소아암 위험군별 치료법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고, 획기적인 백혈병 치료법인 카티(CAR-T)를 국산화한다.
    표준 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겐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분자종양보드’로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한다. 희귀 소아 고형암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 625억원

    공동연구

    서울대병원뿐 아니라 희귀질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전국의 연구자들을 참여시키는 사업이다.
    소아 희귀질환 임상연구를 지원하고, 다기관 공동연구 인프라를 만든다. 소아 특화 공공 데이터 모델을 구축해 글로벌 임상연구 중심이 되는 게 목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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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민수 이야기

소아암과의 싸움,
언제 끝날까요

열두 살 민수 이야기

“학교가 제일 가고 싶어요.”
초등학교 6학년 민수(12·가명)는 친구들이 그립다. 올 3월 서울에 올라와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제주도 집에 한번도 가지 못했다. 민수와 엄마는 서울 종로구 소아암 환자 쉼터 우체국마음이음 한사랑의집에서 머물고 있다. 아빠와 동생은 제주에 있다. 민수 엄마는 불투명한 미래가 두렵다.

“항암 치료를 6번 했는데도 종양이 줄어들지 않아 수술하기로 했어요. 길어야 6개월 정도 예상했는데 얼마나 더 길어질지... 수술 후유증도 무섭고 치료가 끝난 뒤에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돼요.”

끝나지 않는 소아암 생존자의 고통

2020년 기준 10만명 당 16.6명, 한 해 1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암 진단을 받는다. 1~9세 사망원인 1위가 소아암이다.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2020년 소아암 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과 비교)은 86.3%로 성인을 포함한 전체 암환자 생존률(71.5%)보다 높다. 소아암 생존자는 3만~3만5000명에 이른다.

전투에서 이겼어도 깊은 상흔이 남는다. 1993~2012년 소아암을 앓은 2만8045명을 추적했더니 337명(1.2%)이 2차암에 걸렸다. 15개 의료기관이 241명의 소아암 생존자를 조사한 결과 22%가 친구 부족을, 41%가 학습 곤란을, 53%가 성적 저하를 호소했다.

가족들에겐 수년간 치료하며 드는 비용도 큰 부담이다. 치료가 끝나도 재발이나 2차 암(다른 부위에 발생한 암)을 걱정하며 여생을 살아가야 한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소아암 생존자의 고통에 대해 우리 사회는 아직 관심을 두지 않는다. 미국은 장기 추적 위원회가 있다. 한국도 이제 첫 발을 떼었다.

이건희 기부금

3000억원의 나비효과

희귀질환이나 소아암과의 싸움은 획기적인 연구비를 투입해야 가시적인 진전이 가능하다. 넥슨재단이 어린이공공재활병원을 짓는 데 100억원을 기부했던 식으로 말이다.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에 들어온 민간 기부는 2022년 기준 10억원 정도다. 병원과 사회복지법인으로도 산발적으로 돈이 모이지만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게임 체인저가 된 건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이다. 2021년 유족은 유산 가운데 1조원을 의료사업에 기부했다. 감염병 연구에 쓸 7000억원을 국립중앙의료원에, 소아암과 소아 희귀질환에 쓸 3000억원을 서울대병원에 기부했다. 삼성서울병원이 아니라 공공의료기관에 책임과 권한을 맡긴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전국 주요 어린이병원과 어떻게 나눠 써야 유족 뜻대로 소아 환자들에게 고른 혜택을 줄지 2년간 고민했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의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 사업단’은 전국 전문가와 머리를 맞댔다. 그 고민의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열두 살 민수 이야기

열두 살 민수의 꿈

소아암과의 싸움,
언제 끝날까요

미세 잔존암 분석 검사,
2000명에 혜택

방사선 치료를 하면 인지기능(IQ)이 떨어진다. 기금에서 최고 100만원에 달하는 IQ검사비를 지원한다. 피지훈 교수는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환자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검사가 기부금 덕분에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또, 소아암 환자 346명이 ‘미세 잔존암 분석’ 검사를 무상으로 받았다. 치료에 얼마나 잘 반응하는지 평가해 치료 수준을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검사다. 건강보험이 적용돼도 환자 부담금이 40만원에 육박해 형편 때문에 건너뛰는 사례가 많았다. 매달 15~20명씩, 10년간 2000명이 혜택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61명이 기부금으로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 기반 유전체 검사를 받았다. 전체 유전자를 훑어서 원인 유전자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고위험 여부도 가려내 거기에 맞게 치료법을 설계한다.

강형진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과(혈액종양) 교수는 “전체 유전체 검사를 통해 위험군을 나눌 수 있고, 미세 잔존암 검사로 항암제를 세게 쓸지 약하게 쓸지 치료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며 “치료 성적이 더 좋아지고 부작용 없는 정밀 의료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홍회 한국혈우재단 원장은 “재발 가능성 있는 환자를 확실히 치료해 소아 백혈병 완치율을 95%까지 끌어올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소아암에선 없었던 맞춤 치료 실현

소아암 생존자 장기추적 사업도 시작됐다. 국립암센터 박현진 센터장을 비롯한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박 센터장은 “추적관리 플랫폼·앱을 개발하고, 호흡기계·산부인과·치과 질환을 관리하며, 신체·신경학적 변화를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부금은 또다른 난제 해결의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백혈병 치료법 통일 작업이다. 전국 소아암 치료 교수는 69명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의사도 적고, 치료법도 달라 서울 원정치료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전국 소아암 교수 거의 전부가 참여해 표준 치료법 마련 작업을 시작했다.

한 해 몇 명밖에 안 걸리는 소아 고형암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마련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기부금 덕에 한 환자를 두고 각기 다른 병원 의사 10여 명이 한몸처럼 움직이며 치료법을 궁리할 수 있게 됐다.

피지훈 교수는 “현재 기술로 가능한 최선의 진단을 한 명이 아닌 여러 분야 의사들이 모여 확인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최선의 치료를 추천한다”며 “그간 소아암에서 없던 맞춤 치료를 실현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건희 기부금

어디에 쓰이나

  • 600억원

    희귀질환

    유전체, 기능연구 기반 희귀질환을 발굴하고 연구한다. 희귀질환 진단과 첨단기술 치료 지원에도 투입된다. 희귀질환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전국 임상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한 이유다. 국내 극희귀질환의 코호트 연구에도 기부금이 쓰인다.

  • 1,500억원

    소아암

    소아암 위험군별 치료법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고, 획기적인 백혈병 치료법인 카티(CAR-T)를 국산화한다.
    표준 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겐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분자종양보드’로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한다. 희귀 소아 고형암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 625억원

    공동연구

    서울대병원뿐 아니라 희귀질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전국의 연구자들을 참여시키는 사업이다.
    소아 희귀질환 임상연구를 지원하고, 다기관 공동연구 인프라를 만든다. 소아 특화 공공 데이터 모델을 구축해 글로벌 임상연구 중심이 되는 게 목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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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가족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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