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3.0 꽃 피우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청춘에게 낯선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났습니다.
구스티에게 무에타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에기 로트젠이다.
경력만 7년, 43승 11패의 기록을 가진 현역 프로 선수다. 대학생의 자기계발을 지원하기 위해 일류 강사를
섭외 했다. 이 강좌는 한국 기업인 KT&G가 운영한다. 정식 명칭은 ‘상상유니브 자카르타- 무에타이 클래스’다.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현지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확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0년대
들어서 국내 기업들은 중국과 동남아·아프리카 등지에서 다양한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대부분은 집짓기, 우물파기 같은 인프라 개선 활동이다.
그런데 KT&G는 왜 자카르타 한복판에서 태국 전통의 격투기인 무에타이 클래스를 열었을까.
KT&G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글로벌 사회공헌에 나섰다. 전체 판매량의 5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는
만큼 현지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뜻에서다. 내부 논의를 통해 현지인의 ‘생활 속으로’ 스며드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청춘의 고민을 공유하고 해결한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굳이 한국 문화와 접목을 고집하지 않은 것이다.
2015년 여름 KT&G는 자카르타 도심에 있는 대형 홀을 임대해 ‘상상유니브’를 오픈했다. 한편으론
수십 명의 대학생을 일대일 인터뷰해 ‘사회에 나가 무얼 하고 싶은지, 지금 당장 배우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소통형·맞춤형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나온 결과를
토대로 상상유니브 수강생을
모집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생 대상으로 개설한 최초의 교양·역량 개발
프로그램이다. 제안을 한 사람한테도, 받은 사람한테도 낯선 도전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연 5~6%씩 성장하면서 동남아의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지만 대학생들의 교외 활동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턱없이 부족하다. KT&G의 상상유니브는 이런 현실에서 시작한 것이다.
초기부터 ‘상상유니브 자카르타’를 지원해 온 리마 리스노와티 트리삭티대 부총장은 “이제껏
인도네시아에 없었던 프로그램이다. 나도 학생들의 반응이 무척 궁금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2015년 9월 136명의 학생들이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상상유니브의 문을 두드렸다.
지난해엔 402명으로 늘었다. 올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더욱 다양한 커리큘럼을 직접 제안해 달라. 그리고 마음껏 배워라.”
클래스는 댄스와 보컬·무에타이·메이크업·캘리그라피·사진·요리 등 12개로 늘어났다. 바리스타 과정은
워낙 인기가 높아 2개 반으로 확대했다. 트리삭티대·나시오날대 등에도 강의실이 생겼다. 상상유니브의
운영 취지에 공감한 대학들이 전용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상상유니브 수강생은 올해 2000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젊은이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내년엔 자카르타 대학 1~2곳과 제휴를 늘릴
방침이다.
인도네시아 대학생의 자기계발 활동 지원
현지 조사 통해 수요 맞춘 커리큘럼 개발
인도네시아 대학생
자카르타 트리삭티대학 등 3곳
바리스타, 요리, 댄스, 메이크업, 사진,
캘리그라피, 무에타이, 피규어 등 12개
인도네시아 최대 규모의 사립대학인 트리삭티대의 리마 리소노와티(45·미디어학부)
부총장은 2015년부터 ‘상상유니브 자카르타’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왔다.
대학 캠퍼스 안에 전용 공간을 제공한 ‘든든한 후견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소프트웨어적인 사회공헌이 한국 기업과 국가 이미지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나아가서는 ‘한류 3.0’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드라마 ‘겨울연가’ ‘대장금’ 등이 인기 끌면서
현지에서 자생적으로 한국 문화에 호감
2002년 월드컵 이후 체계적인 스타 육성과
기획·마케팅으로 수출 상품화 성공
현지의 문화 소비층과 직접 소통을 통해
‘맞춤형 한류’로 업그레이드
자카르타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KT&G는 나름 기대감이 있었다.
국내에서 쌓아온 ‘내공’이 든든했기 때문이다. KT&G는 2007년부터 국내에서 ‘상상마당’을 운영하고 있다. 젊음의
메카인 서울 홍익대 앞과 강원도 춘천, 충남 논산 등에서 아티스트 지망생을 대상으로 소통 중심의 문화 생태계를
지원하는 활동이다.
일반인에겐 ‘문화허브’로 유명하지만 상상마당은, 아주 특별한 ‘인재 육성 프로젝트’로도 눈길을 끈다.
예술가 지망생에게 전문적인 교육과 지속적인 동기 부여를 하는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림책 워크숍, 피규어(사람이나 동물·캐릭터 등을 정밀하게 본뜬 모형 장난감) 디자인, 문화예술 비평 분야 등에서
5~7개월간 집중 교육을 한다.
수강생들은 수료에 즈음해 작품전·전시회 같은 결과물을 내놓고,
이를 바탕으로 창업을 준비하기도 한다.
자카르타의 프란스가 바리스타 과정을 마치고 ‘인도네시아의 커피 왕’을 꿈꾸는 것과 비슷하다.
우세계씨는 이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요즘 독립 출판가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상상마당에서 출판 전문가를 양성하는 ‘어바웃 북스’ 프로추어 과정을 수료한 게 계기가 됐다.
프로추어(proteur)는 전문가(professional)와 아마추어(amateur)의 경계에 있다는 뜻으로,
전문가 수준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우씨는 『공포의 미하악』, 『일상의 살인』
등을
펴내면서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상상에서만 끝난다면 상상마당이 아니다”고 말한다.
디자인 피규어 심화 과정을 마친 서현씨도 아트토이 작가로 활동 중이다.
서씨는 “상상 속 이야기를 아트토이로 만들고 싶었다”며 “피규어 수업을 통해 예전부터
꿈꿨던 것을 이룰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상상마당은 멋진 놀이터”라고 정의한다.
여성 솔로 뮤지션인 사비나 앤 드론즈는 대중음악 창작 지원 프로그램인 ‘써라운드’에 선발돼
지난해 2집 앨범 제작을 지원받았다. 그는 “제작비뿐 아니라 춘천 상상마당 녹음실이 제공돼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천만 관객을 모은 ‘부산행’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연상호, 록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등을
데뷔 초창기부터 지원한 곳이 KT&G 상상마당이다.
포털 사이트 문화예술분야 검색
순위(20~30대 대상). 온라인
노출은 연 3000만 건이 넘는다.
2016년 상상마당 무대에 오른 뮤지션
숫자. 지금까지 함께 한 아티스트는
2만4000여 명이다.
인재 육성 아카데미부터 영화·공연
·전시 등 2016년 운영된 프로그램.
누적 3만여 건에 이른다.
2011~16년 상상마당 홍대·춘천
·논산을 다녀간 방문객 수. 최근엔
한해 180만여 명이 찾는다.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 (1953년)
/ 하워드 보웬 지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학문적 관심 대상이 된 것은 1950년대부터다. 경제학자 하워드 보웬은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1953년)이라는 저서에서 “기업가가 의사결정을 할 때는 사회 전체의 목적이나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부여 받는다”고 규정했다. 미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사회공헌 투자에 나선 것은 1970~80년대 들어서다.
1883년 설립된 국영 연초 제작소인 ‘순화국(順和局)’은 KT&G의 창립 기원이다. 국영 기업을 모태로 130여 만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KT&G는, 국민 기업으로서 회사의 성과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2년 완전 민영화 이후엔 ‘함께하는 기업’을 경영이념 중 하나로 선포했다.
2004년 이후 지난해까지 KT&G는 매출의 2% 이상을 꾸준히 사회 공헌 활동에 지원하고 있다. 이는 대기업 평균인 0.2%(전국경제인연합회 집계)보다 10배가량 높은 비율이다. 본격적으로 글로벌 사회공헌에 나선 것은 2014년, 자카르타에 상상유니브를 시범 개설한 것은 2015년이다. 이와 더불어 현지인을 적극 채용해 지역경제를 살리고,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있다.
KT&G 사회공헌의 또 다른 키워드는 ‘청춘’이다. 미래 세대와 함께 나눔 활동을 실천해 더불어 가꾸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취지에서다.
2013년부터 ‘도심 속 자연공원을 보존하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북한산 생태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대학생 자원봉사자 100여 명이 참여한다. 올해 4월엔 북한산 내 산림이 훼손된 지역에 자생종인 산수국 2000그루를 심었다.
마을벽화 그리기는 지금까지 70여 회가 실시돼 8000명 넘게 참여한 인기 프로그램이다. 노후화된 옛 도심에 벽화를 그리고 화단을 가꿔 밝고 생기 있는 도시로 탈바꿈시킨다는 프로젝트다. 올해는 부산·인천·대전·창원·전주 등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JOHN WINTHROP
1587년 ~ 1649년
1630년 청교도를 태우고 미국 보스턴으로 입항하던 아라벨라호 선상에서 존 윈스롭 목사는 이렇게 강조했다. “언덕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기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자.” 이 연설은 근대 기부 문화의 연원으로 불린다(기 소르망 지음, 『세상을 바꾸는 착한 돈』, 문학세계). 이후 미국 역사에서 벤자민 프랭클린부터 존 록펠러,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 등으로 부의 사회 환원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도 1980년대 들어 사회공헌에 대한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복지재단이 속속 설립됐다. 다만 일회성 기부가 대부분이었다. 전담 조직을 갖추는 등 체계화가 이뤄진 것은 90년대 이후다.
KT&G 사회공헌의 키워드는 ‘상상’이다. 서울 홍익대 앞에 ‘상상 마당’(2007년)을 세워 젊은 문화예술인들을 적극 지원하면서 유명 해졌다. ‘더 좋은 내일을 응원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학생 들의 ‘자기성장’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꿈과 열정만 가져오면 이를 실현하는 지렛대가 되겠다는 게 기획 의도였다.
KT&G 사회공헌의 주요한 운영 철학은 세심함과 꾸준함이다. 디테일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사업을 발굴하고 뚝심 있게 지원한 다는 것이다.
사회복지재단에 경승용차를 지원하는 사업이 대표적이다. 현장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찾아가는 복지사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복지 수혜자의 특성상 도로시설이 열악한 곳을 운행하는데 적합한 경차로 지원 수단을 정했다. KT&G복지재단은 2004년부터 ‘경승용차 공급사업’을 실시해 매년 100대씩, 지금까지 1400대의 경차를 전달했다.
노인 복지와 건강 증진을 위해 주최한 ‘어르신 탁구대회’는 올해 14회째를 맞았다. 2016년 11월 서울 송파구 SK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탁구 대회에는 전국 160개 노인복지시설 소속 60세 이상 노인 1280여 명이 참여했다. 응원단까지 합치면 3000명 가까이 모이는 대형 행사다.
물고기를 잡아 사회취약계층에게 전달하는 단순 기부자를 넘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KT&G 사회공헌의 역할은 진화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물고기가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자생 환경을 만드는 최종 목표다. 사회공헌실 관계자의 말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사회공헌은) 사회적 이슈를 발굴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개선·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공헌 활동의 최종 목표는 경제적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이어서다. 그래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따라 구체적인 프로그램도 자연스럽게 맞춤형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기획/취재김창규 랩장, 이상재 기자, 곽재민 기자 | 디자인 박지은 | 웹개발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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